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단 편집) == 전운이 밀려오다(히틀러 집권기) == >추종자들은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1920년대 초반부터 히틀러의 머리 속에 심어 놓았다. 히틀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과대망상이 심했는데 거기에 불을 지핀 격이었다. 그때부터 특히 1933년 이후로 내치도 그렇고 외교 정책이 눈부신 성공을 거두자 지도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그런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히틀러는 끝 모를 숭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도자를 누구보다도 숭배한 사람은 히틀러 자신이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오만은 그렇게 해서 굳어졌다. 그리고 1936년부터 벌어지는 일은 오만에 대한 복수였다. > >독일은 히틀러에게 점령당했다. 그뿐 아니었다. 독일은 팽창을 원했다. 세계 평화는 조만간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내가 예견한 대로 굴러간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히틀러는 스스로를 신의 섭리가 운명 지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신이 나를 위해 깔아놓은 길을 잠결에 걸어가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다."고 3월 14일 뮌헨 집회에서 히틀러는 기염을 토했다. 체제 안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행사하던 모든 집단이 이제 죄다 히틀러 밑으로 들어왔다. 히틀러의 권위는 아무도 흔들 수 없었다.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신이 깔아놓은 길이 나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통찰력이 있었던 사람은 그 무렵에는 많지 않았다.''' >---- >히틀러 평전 1권 마지막 부분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나치는 매우 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하여,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지 불과 2년 만에 모든 야당은 사라졌고 당내 좌파는 박멸되었으며[* 나치당은 반공주의를 표방했으나 동시에 사회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좌파들이 당내 좌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 내부의 좌파들은 1928년부터 집권전까지 강령이나 당내 노선차이를 빌미로 계속 숙청되었고,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완벽히 제거된다.]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었으며 독일은 재무장을 향해 달려갔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절대권력을 얻고는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했다. 1934년 6월 30일 이른바 [[장검의 밤]] 사건으로 [[돌격대]] 지휘관인 [[에른스트 룀]]을 제거하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 [[프란츠 폰 파펜]]과 같은 위험요소들을 제거하고 위협함으로써 자신의 경쟁자를 모두 해치우는 데 성공했고 이 일로 히틀러는 절대권력을 다지게 된다. 재미있게도 히틀러는 초반에는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해결하고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폴란드 제2공화국]]에 유화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폴란드가 이뻐서가 아니고 히틀러 집권 당시에는 독일이 재무장도 안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당에 흡수되어버렸고 이러한 권력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히틀러는 민주공화제 시대에 비축되었던 국력을 이용해서 제3제국의 발전을 시도했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인리히 힘러]]와 [[헤르만 괴링]]이 군을 장악하기 위해 벌어진 이른바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발생하자 히틀러는 군 최고통수권자가 되었고 유럽에는 전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 정세를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과 관계를 규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휴지장이 되었고, 나치 내부의 여러가지 반대 의견들조차 깡그리 무시하고 모험적으로 강행한 [[라인란트 재무장]]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도취된 히틀러는 소위 '[[레벤스라움|게르만족의 생존공간]]'을 확보한다는 미명하에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이처럼 상식을 저버린 모험의 연이은 성공은 히틀러의 도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라인란트 재무장, 영독 해군조약과 [[오스트리아 병합]] 등 연이은 외교적 성공으로 히틀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으며 독일 대중들은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히틀러 주변 인물들의 견제와 조언은 무시당하곤 했다. 히틀러는 계속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폴란드 침공]]도 독일군이 다 준비되기를 기다리면 5년이 더 필요했는데[* 특히 갈려버린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에리히 레더]] 제독이 추진한 Z계획은 '''완료되는 시점이 1945년 이었다.'''], 그러면 [[제갈각|정복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든다는 이유]]가 언급될 정도였다. 이 시기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과 [[1936 베를린 올림픽]]을 치렀다. 히틀러는 두 올림픽을 나치 독일의 홍보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편 [[아우토반]] 등 나치 독일 정부의 업적들조차 대부분은 보헤미안 기질이 넘쳤던 히틀러 개인의 즉흥적인 결정 내지는 나치 권력자들의 명예욕에 의한 것이었으며, 제대로 된 토의와 명령하달체계에 따라 실행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부 경기부양책은 [[하인리히 브뤼닝]]과 슐라이허 재임시 기획되고 효과가 히틀러 때 나타난것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스페인 내전]] 참전조차 히틀러가 오페라 보다가 즉흥적으로 "도와주지 뭐!" 라고 한 게 화근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이후에 폰 블롬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군인들과 관료들이 달라붙어 스페인에서 삥뜯을 거 잘 뜯고 했다지만, 히틀러 개인은 내전 과정에서 포켓전함 어드미럴 그라프쉬페 호가 공화정부측 폭격기에 피격되자 미친 듯이 날뛰면서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하는 등, 치밀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이에 무차별적 지원을 해준 히틀러와 상반되게 반대편 인민전선을 지원한 스탈린 동무는 꼼꼼하게 가격을 다 치러야 무기를 보내주고 값이 밀리면 지원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숙청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스탈린의 지나친 이해타산적인 행보로 인해 스페인의 인민전선은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완전히 몰락했다. 만약에 인민전선이 스페인을 장악했더라면 독소전쟁때 소련을 크게 도울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전형적인 [[소탐대실]]인 셈이다.] 이렇게 독일의 여력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일들이 하나 둘씩 쌓이다 보니, 생활여건 유지와 계속된 재무장을 위한 자원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침략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 다만 독일의 경제적 위기 때문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히틀러는 원래부터 다른 국가들을 침략할 생각으로 임기 초반부터 군비 확장에 열을 올렸기에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오히려 히틀러가 침략을 통해서만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2차 대전 개전을 즈음해서는 나치당 내부에서조차 히틀러 특유의 막가라식 폭주를 멈추면 정권이 뒤집힌다는 위기의식까지 있을 정도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989cad6fedda5823845cb011a72661f94ce17d561280cd2a9ecb66006537ef63.jpg|width=100%]]}}}|| || 1938년 [[뮌헨 협정]]. 왼쪽부터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나치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왕국의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 || 이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연방국]]을 합병하고([[안슐루스]]), 체코의 독일인 다수지역인 [[주데텐란트]]에 대한 야욕을 보이며 주테텐란트를 내놓으라며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을 통한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텐란트의 영유권을 독일에게 할양하게 된다. 독일은 거기까지 만족하는 선으로서 평화는 계속되는 듯 했으나 가진 것 없이 도박판에서 돈을 따면 점점 큰 판으로 넘어가듯 얼마 지나지도 않아 1939년 초에 체코를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를 보호국으로 만드는 등 확장에 대한 야욕을 더욱 드러냈다. 설마 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때부터 독일과의 전쟁이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그간 나치 독일에 대해 펼쳤던 유화 정책을 제고하며 군비를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에 있는 유대인에게는 절망의 밤이었다. 경찰들이 파괴와 구타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베를린 경찰의 부총수는 한 경찰관이 약탈된 신발 가게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임무였으나 자신의 가치를 저버리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것이다. 공식 집계에 의하면 814개의 상점과 171개의 가옥이 파괴되고, 191개의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다. 36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36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이드리히는 실제 피해가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시인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폴란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하게 된 [[동프로이센]]으로의 단치히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의 할양을 요구조건으로 걸고 폴란드에게 협박을 하였으나, 폴란드는 이 지역을 상실하면 바다로의 출구가 막히는 등의 이유로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폴란드가 영국과의 군사방위조약을 맺으면서 강경하게 저항하자 히틀러는 결국 창당 초기부터 이념적으로 대립했으면서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에게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서부 지역의 영토들을 잃어 폴란드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 비밀리에 폴란드 및 동유럽 전체의 분할을 약속한다.[* 소련은 1939년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소폴전쟁에서의 패전으로 폴란드에게 뜯겼던 르비우와 브레스트 등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서부 지방의 도시들의 영유권을 다시 재합병하는데 성공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looah.com/2222_o.jpg|width=100%]]}}}|| || [[마하트마 간디]]가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 편지의 내용은 한마디로 "[[간디(문명 시리즈)|전쟁 하지마]]"였다.[* 이 편지에서 간디는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둘이 친구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단지 예의상의 표현으로 보인다.] || 결국,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막상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폴란드만 잡고 끝낼 전쟁이였다. 그러나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보여준 미온적인 대응과 태도 때문이지, 결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히틀러와 당시 [[독일 국방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를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 포고를 하는 바람에 전쟁이 더 커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령 폴란드가 요구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동유럽권을 침략하는 목적 자체가 소련 및 서방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으니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공산이 높다. 다만 위의 주장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히틀러의 대외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의 멸망과 레벤스라움 확보였다. 지금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1939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히틀러는 폴란드와 동맹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반폴란드 정서가 극심했던 당시 독일 여론을 무시하면서 까지 이걸 고려한 이유가 단순히 폴란드와의 동맹이 소련과의 전쟁에 크게 도움을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복한 소련 영토를 폴란드와 분할할 것을 제안했을 정도로 히틀러에게 압도적으로 중요한 관심사는 소련 침공과 멸망이었다. 그에 비하면 다른 외교/영토 문제는 히틀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즉, 만약에 독일-폴란드 동맹이 실현되어 폴란드를 추축군 세력에 편입시켰거나 영국-프랑스가 폴란드 침공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최소한 잠시나마 서유럽에 평화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히틀러는 베를린 외곽에 대규모 공사를 지시했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하고 난 뒤에 세계의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이미 세계를 정복하려는 의지가 강력했으며 그래서 그 세계의 수도가 될 도시 이름을 '[[게르마니아]]'로 짓고 측근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인구 1억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곧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8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국민회관의 초대형 돔이 압권이었다.[* 문제는 베를린이 늪지대 기반이었기 때문에 현대 기술로도 히틀러가 원한 게르마니아를 지을 수 없었다. 슈페어 역시 이런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히틀러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타협가능한 선에서 현실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바람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도시는 미완성 상태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풍기고 있었다. [[알베르트 슈페어|이 도시를 계획한 건축가]]부터 이미 나치 전범이었다.[* 슈페어는 2차 대전 말기 군수장관이기도 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히틀러는 이 계획을 구상할 때 "당신들은 12년 후의 베를린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며 자부했는데, 그가 이 말을 했을 때가 1933년. '''12년 후인 1945년에는 [[소련군]]이 [[베를린]]을 초토화시키고 점령했으니''' 의도야 어떻든 그 말은 사실이 돼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